달콤한 인생 (A Bittersweet Life, 2005)

영화 <달콤한 인생 (A Bittersweet Life, 2005)>
김지운 감독


인생에 있어서 안정된 궤도란 없다.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데, 흔들리는 게 바람인지 나뭇가지인지 묻는 건 어리석다. 어리석은 질문에 스승께서는 현명한 답을 내려주신다. 흔들리는 건 바람도 아니고 나뭇가지도 아니다. 다만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상태란 있을 수 없다. 마음이란 그런 거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던가? 생명이란 그렇게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거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천지가 뒤엎어질 수도 있다. 선우(이병헌)는 희수(신민아)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걸까? 영화가 보여준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선우는 희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며 덮으려 했을 뿐이다. 이렇듯 조그마한 여지를 남긴 게 큰 잘못일 수는 없다. 그래서 선우는 끝에 가서 보스(김영철)에게 묻는다. “말 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건 선우만 모르는 게 아니라, 보스도 모르는 거다. 왜 그랬을까?

희수가 흔들리고, 선우가 흔들리고, 보스가 흔들린다. 흔들리고 흔들리다 보니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는데, 그걸 두고 따지는 건 우문이다. 바람이 흔들리는 건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이 흔들린 건지도. 그랬다면 다행이겠는데, 영화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칼질 하는 싸움이 총질 하는 싸움이 되면서 승패는 진작부터 갈린다.

아주 작은 흔들림이 한 인간을 궁지로 몰고 간다. 헤어 나올 방법은 없다. 다만 선택이 남았을 뿐이다. 끝까지 가보는 선택이 남는다. 그러나 싸움의 끝은 비참하다. 이겨도 답이 나오지 않는 막장이 되어버린 인생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가보고자 하는 마음은,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해지는, 아주 작은 꼼지락거림이었을 뿐이다. 꼼지락거리며 부는 바람이 태평양을 건너면 허리케인이 된다지? 그런 거다. 칼질이 총질로 바뀔 때 바람은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던 거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타이틀이 역설이니 어쩌니 하는 건, 제목 붙이 이에 대한 예우일 뿐, 영화는 정설이건 역설이건 ‘달콤한’이라는 수사의 의미를 살려내지 못한다. 다만 여유롭게 세련된 모습으로 선우가 퍼먹는 푸딩인지 아이스크림인지 하는 그것과 중간중간 보이는 군것질 거리들이 달콤했을 수는 있겠다. 그 밖에는 달콤한 것도, 혹은 씁쓸한 것도 없다. 왜냐? 보스가 선우에게 왜 그랬는지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선우 또한 보스를 처단한 뒤에도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자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콤한지 씁쓸한지 하는 식의 가치 평가는, 죽어 다시 만난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살짝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의 맛은 달콤하지도 씁쓸하지도 못한, 싱거운 것도 맛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런 맛을 남길 뿐이다.

 

by 상큼한좀비통조림 | 2009/11/27 22:58 | 이것 또한 내 세상 | 트랙백 | 덧글(0)

자전거 여행 2

『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개만을 도매하는 이 판을 상인들은 ‘개판’이라고 부른다”라면서 모란시장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철망 안에서 개들은 몸을 포개고 뒤엉켜 있다. 개들은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면서 그 며칠을 견디어낸다. 견디지 않으면 무슨 도리 있겠는가. 철망 안에서 개들은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도 하고 수놈이 암놈의 사타구니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린다. 맨 밑에 깔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이 든 개들도 있다. 잠들었던 개가 갑자기 몸을 솟구치며 일어나 목덜미 털을 곤두세우며 옆의 개를 물어뜯고 물린 개는 또 딴 개를 물어뜯는다. 한바탕 엎치락뒤치락 물고 물리는 북새통이 끝나면 다시 밑에 깔리는 개는 혀를 빼물고 잠을 청한다. 물어도, 물어도, 짖어도, 뒹굴어도, 흘레를 붙어도, 잠을 청해도, 철망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아도…… 마지막 날은 정확히 다가온다. 이따금씩 상점주인은 고무호스로 개들에게 수돗물을 끼얹어 개들의 더위를 위로해준다.”(237쪽)

식용견 시장의 모습에 이어 조금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 애완견 시장의 모습이 이어진다. 김훈의 바퀴가 둘러본 다른 곳은 그저 ‘더 커 보이는 남의 떡’ 정도로 여기고 탐내지 않으려 애써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며 읽었는데, 모란시장만큼은 탐이 난다. 물론 개털과 함께 날리는 동물의 체취에 코를 싸쥐게 될 테지만, 이 개판에 어우러진 사람판의 풍경은 분명 진경일 것만 같다.

 

by 상큼한좀비통조림 | 2009/11/27 02:51 |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 트랙백 | 덧글(0)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이마누엘 칸트 지음 / 이원봉 옮김 / 책세상 / 2002년


드라마 <선덕여왕>의 이번 주 방송분에서는 도덕에 대한 칸트의 이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유신이 월야에 의해 복야회와 연류 되었을 거라는 정황인데, 팔이 안으로 굽어 유신의 편을 드는 이들도 있지만 정세를 판단하여 유신이 꺾인다면 비담의 세력이 너무 커질 거라는 우려의 시선 또한 있었다. 선덕이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는 춘추의 역할이 컸으나 복야회를 인정할 수 없는 선덕은 유신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비담의 세력 또한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선덕은 정공법을 취한다.

비담이 선덕에게 유신을 신국의 적으로 선포할 것을 간하면서 대의에 어긋남이 없다고 말할 때, 선덕은 그걸 인정하고 곧바로 사량부령 비담의 세력을 견제하며 반문한다. “물론 대의에 어긋남은 없죠. 허나, 또한 비담공의 사욕에도 어긋남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칸트를 읽는 와중이어서 그랬는지, 세 가지로 구분되는 행위의 동기를 떠올리게 된다. 칸트는 행위의 동기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1)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 2)직접적인 경향성에서 하는 행위, 3)‘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로 구분한다.

1)의 경우는 교환 가치로 설명된다. 상인이 정직한 것은 상품을 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니 도덕적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2)의 경우에는 선한 행위로 이익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부심이나 명예 등의 내적 필요에 의한 행위를 말한다. 3)의 경우가 아무런 사심이 개입되지 않은 도덕적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는 건데, 칸트는 ‘도덕’의 가치를 너무 높은 곳에 설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1) 정도의 동기만으로 상도의를 지키며 사는 것도 꽤나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2)의 경우에는 행위가 그 어떤 명분으로 제시될 수도 있겠는데, 정치인들의 경우에는 2)조차 ‘1)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로 전락시키는 경향(그래서 ‘경향성’이라고 번역된 건가?)을 지니게 마련이다. 교환으로 얻는 물질적 이득이 아니라, 명분을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걸러지고 나면, 도덕은 꽤나 높은 수준에서 요구된다. <선덕여왕>의 비담의 경우 우리가 흔히 꽁수라 부르는 꿍꿍이가 있었던 거고, 그 꿍꿍이를 대의로 포장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걸 간파하는 건 도덕에 대한 통찰인데, 여기서 수단과 목적이 나뉜다. 행위를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을 ‘도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비담은 대의에 어긋나진 않았을지언정, 사욕에도 어긋나지 않게 유신과 세력 싸움을 벌였던 건데, 이는 선덕이 그동안 미실을 통해 오랜 시간 몸소 당하며 배워온 것이지 않던가. 그 정도 통찰은 있게 마련이다. 선덕에게는 커져가는 비담의 세력이 문제되기도 하겠지만, 대의에 어긋나지 않은 유신의 처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놓인다. 비담이 2)와 3) 사이에서 2)를 취했다면, 선덕은 지금 2)에서 3)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유신에 대한 신의라는 사욕을 버려야 하는 순간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유신의 유배였다. 그와 더불어 춘추를 띄우는 것으로 비담을 견제한 것까지가 선덕이 2)에서 3)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왕의 자리에서 3)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니 ‘삼한일통’이라는 대의는 계속해서 추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칸트의 견지에서는 ‘삼한일통’이라는 목적을 두고 행해지는 정치는 그 자체가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긴 하다는 아이러니가 남긴 하지만, 2)에서 3)으로 옮겨가는 운동성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게 드라마 <선덕여왕>의 매력일 수도 있다.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라는, 칸트의 저술 가운데 비교적 쉽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어려운 이 책을 읽으면서 요 정도 해석을 끌어낼 수 있었던 건, 역자인 이원봉의 해제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도덕」이라는 글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때마침 비담의 멋진 한수(결국 실패하고 말긴 했지만)에서 배운 바도 크다.

칸트로 비담 읽기, 좀 억지스러웠나?

 

by 상큼한좀비통조림 | 2009/11/25 18:14 |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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